<2018년 장려상 수상작 (에세이)>
저는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닙니다. 또한 저희가족 구성원 그 누구도 아동학대 가해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동학대 피해자(세형이[가명])를 구해주는 아동지킴이 역할을 했습니다. 점점 각박해지고 냉담한 현실 속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고 한 아이를 구한 우리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의 깊은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면,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세형이와 아동학대 가해자인 세형이 아버지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린 아동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한 우리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세형이와 같은 아이들이 아직 우리나라에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야기가 아동지킴이 공모전 대회를 통해 세상에 소개된다면, 사람들이 우리나라 아동학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늘어나면 우리나라의 모든 아동이 더 이상 학대받지 않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17년 아동학대 판정 22367건. 2018년 8월까지 조사된 아동학대는 14461건. 한해에 대략 2만여 명의 아동이 훈육과 교육이라는 탈을 쓴 괴물들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아동학대로 인하여 세상과 안타까운 이별을 한 아이들의 숫자도 무려 170여 명에 달하고 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세상을 도배하는 아동학대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TV를 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아동학대.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면 쏟아지는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들 소식. 그들의 울부짖음이 내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나는 아동학대 피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아동학대를 목격했으며, 학대를 당한 아이와 함께 지난 세월을 같이 보냈다. 지금부터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세형이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아직 해가 뜨기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 샌 비명이 나의 귓속을 파고들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또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둔탁한 소리와 남자아이의 짧은 비명이 몇 분간 이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잔인한 소리에 잠이 깨서 거실로 나와 있었다.
“또 애를 잡나봐요”
“어이구.. 이를 어쩐다.”
“경찰에다가 신고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게요.”
며칠 전에 이사 온 옆집이다. 언제부턴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원인모를 아이의 울음소리가 불청객처럼 우리 집을 타고 들어왔다. 첫 번째 날은 아이가 잘못해서 부모님에게 혼이 나는가 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원인모를 둔탁한 소리에 우리는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날 우리 가족은 발만 동동 구르면서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모른 체 합시다. 만약에 한 번만 더 아이 잡는 소리가 나면 그땐 우리가 팔을 걷어 붙이자고요.”
아버지의 설득에 어머니는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밤중의 소동은 일 단락 되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또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의 고막을 울렸다. 이번엔 넘어 갈 수 없다는 굳은 표정과 함께 아버지는 한밤중에 112에 신고를 했다. 아버지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은 아버지와 함께 문제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의 집은 굳게 닫힌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옆집 아저씨와의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거 남의 집안일이니 신경 끄고 삽시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띈 아저씨의 입속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당시 어린 나였지만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멀리서 옆집을 빼꼼 바라보았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데도 술 냄새가 진동했고, 아저씨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팬티 한 장만 걸친 남자아이가 빨갛게 부은 얼굴을 하고 아저씨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날 아저씨는 아동학대 현행범으로 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경찰과 함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경찰서로 갔고 어머니는 공포에 사로잡힌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한숨 재웠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거실에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남자아이에게 아침을 차려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아침을 먹고 우리 가족은 말없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몇 시간의 침묵을 깨고 아이의 굳게 다문 입에서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부모님은 말없이 남자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아이가 지난날의 겪은 고통을 잠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이세형. 나이는 11살.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세형이가 겪은 지난날의 시간은 끔찍했다. 세형이의 어머니도 남편의 가정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버지와 단둘이서 사는데, 세형이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던졌으며, 그 작은 아이에게 엄마를 찾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주민신고를 받고 경찰이 가끔 집에 오긴 했는데, 세형이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훈방조치만 받고 바로 풀려났으며, 경찰서에 갔다 온 날에는 세형이를 이불로 둘둘 말아놓고 사정없이 발길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잘 먹지도 못해서 뼈밖에 없는 아이를 말이다. 그 작은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세형이가 그 동안에 겪었던 고통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렇게 참담한 시간을 겪으며 이집 저집 이사해 다니다가 우리 집 옆으로 세형이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온 것이었다. 그렇게 세형이는 한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냈다. 밤이 되면 악몽을 꾸는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악몽을 꾼 날이면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이제 좀 있으면 아버지가 집으로 올 텐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했다. 우리와 함께 살면 안 되겠냐고, 그것이 곤란하면 자신이 안전하게 있을 장소를 찾아달라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모님도 안타까운 나머지 이곳저곳을 수소문해서 아이가 안전하게 있을 곳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의 법은 아동학대 부모에게 너무나 관대했으며, 학대를 당한 아이가 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친권이 우선시 되는 우리나라였기에, 부모가 자신의 자식과 함께 살겠다 하면 어쩔 수 없이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법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세형이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연락이 닿을 만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세형이는 우리에게 연락이 닿을만한 친척들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우리 가족은 세형이로부터 전화번호를 받고, 번호 한 개씩 전화를 돌려보았다. 세형이의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지냈는지, 무슨 원한을 지녔는지 세형이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그들은 혀를 내두르면서 세형이를 거부했다. 마지막 남은 전화번호 한 개. 세형이의 할머니 전화번호였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서 우리 가족은 세형이 할머니가 계신 충남 서산으로 내려갔다. 한적한 시골 마을. 세형이 할머니네 도착하니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이 우리를 마중 나와 반겼다. 그동안 연락을 끊고 살아서 세형이 아버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세형이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는 정말 안타까운 가정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세형이 할머니는 우리 가족의 손을 잡으며 세형이가 조금 클 때까지만 이라도 보살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가족도 세형이의 상황이 안타까워 세형이와 함께 지내고 싶었지만, 만약에 세형이 아버지가 반대하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할머니께 설명해 드렸다. 할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세형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충남에서 돌아온 우리는 세형이 아버지가 집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세형이 아버지가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우리 부모님은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왔으며, 아버지는 세형이 아버지와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세형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세형이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길게 쉬더니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떴다. 세형이 아버지는 아침에는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를 했고 밤이면 술에 쪄들어서 들어오기 일쑤였다. 일이 힘들다 보니,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으며, 사회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아이와 아내에게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했다고 아버지께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세형이 아버지와 긴 시간을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아저씨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아동학대는 분명한 범법행위이며 죄다. 이를 아버지가 명확하게 아저씨에게 설명해주었다. 아저씨는 한 번만 믿어 달라고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우리 가족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는 듯해서 세형이를 다시 옆집으로 돌려보내주기로 했다.
“세형아 아빠가 한 번만 더 때리면 아저씨한테 바로 연락해라!”
“네. 아저씨”
우리 아버지는 세형이의 작은 손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래 아빠가 한 번만 더 그러면 아저씨한테 말하렴. 다시는 아빠가 세형이에게 나쁜 행동 하지 않을게. 아빠 한번만 믿어줘.”
“알겠어.”
아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동안 세형이 아버지가 한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우리 가족에게 약속까지 해서 우리는 한번 세형이 아버지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세형이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 이상 우리 아파트에는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세형이는 잘 지내는 듯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형!’하고 반갑게 나를 맞이했으며, 세형이의 몸과 마음에 있던 상처 자국은 점차 아물어 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가 이사를 하는 날이 왔다.
“형, 아저씨, 아줌마. 여기서 살면 안돼요?”
“...”
부모님은 마지막으로 세형이를 말없이 꽉 안아주었다. 그리고 세형이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우리는 그날 세형이와 그렇게 이별을 했다.
“세형이 잘 키우고.”
“예. 이 못난 놈. 정신 차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는 고개를 숙이며 우리가 떠나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쉽고 슬펐으나, 한편으로는 행복한 이별이었다.
우리가족은 아동지킴이
수상자 : 권현준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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